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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고
  • 기자명 빛가람타임스 기자

나주의 선비정신으로 호남을 일으키다

  • 입력 2015.06.05 14:33
  • 수정 2015.06.05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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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일환 시인
조선의 대학자 신숙주가 탄생한 고장으로 수많은 선비들을 배출하여 나라에 공헌한 선비고을 나주를 아는가? 성종11년 박성건이 지은 금성별곡 제1장에 나주를 소개한 내용을 보면 해지동 호지남 나주대목 금성산 금성포 환고류치 위 종수인재 경기하여 천년승지 민안물부(재창) 위 가기총롱 경기하여 바다의 동쪽인 해동·湖의 남쪽인 호남 나주는 큰 목사가 다스리는 고을로 錦城山이 우뚝 솟고·錦城浦로 흘러가는 물과 함께 영원히 변함없는 산천이로다.
아! 빼어난 재주있고 놀라운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아득한 옛날부터 경치좋고 이름난 곳, 백성들이 편안하게 삶은 물산이 풍성함이니, 아! 아름다운 서기가 푸르고도 성한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나주는 영산강이 중심을 흐르며 소경이라 불리는 451m의 금성산이 시의 중심에 우뚝 서있고 동으로 화순 서로는 무안군 함평군 북으로는 광주광역시에 이르는 교통중심 요충지다. 또한 나주평야가 있어 곡창지대로 평화로운 고장이다.
이순신장군의 ‘약무호남 시무국가’어찌 호남이 없으면 이 나라가 존재하겠는가? 나라의 큰 국난이 있을 때마다 홀연히 일어나 나라를 구하고 현대에 이르러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가 되었던 고장이다. 나주에 가면 선비사상 가득한 근엄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나주사람들은 오직 나라를 위한 충심과 부모를 위한 효심으로 절개 곧은 선비로 태어났다. 조선의 선비들은 굳은 지조를 생명처럼 여기며 소신 있는 생각과 행동을 했다. 선비는 부끄러움을 안다. 얄팍한 지식으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또한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사약을 마다않고 부패라는 단어 앞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저항하였다. 나주는 선비의 고장으로 나라를 위하는 힘의 원천이 바로 선비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나주정신이 바로 호남 정신을 의미한다. 옛 선비들은 세상의 변화에 따른 시대의 흐름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단점도 있다.
그러나 요즘 정치인들 사이에 ‘선당 후사’라는 말을 많이 한다. 나주의 선비들은 다르다. 선민 속으로 들어간 삶속에 자신의 삶을 부양시켰기 때문이다. 나보다는, 패당을 만들어 보호하기 위함보다는 나라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며 행동했다. 나를 버린 삶을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함 이였다 는 것을 우리는 고민해야한다. 물질문명으로 황폐해진 삶에다 정보화의 물결이 시시각각 거세게 몰아치는 현실에서 가능할까? 그러나 호남인들의 삶속에는 충효라는 두 단어를 유별나게 가슴에 품고 있다.
배고픔에도 배를 움켜잡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과 지금 나 먹고 살기 바쁜 현대인들의 삶은 각기 다른 결과를 내놓는다.
지금 나에게 나라를 위해 헌신봉사하며 전 재산을 나라를 위해 바치라면 그렇게 할 자 몇이나 있겠는가? 권력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들은 많다.
지금처럼 험난한 난세에 김덕령 장군이 형장에서 고문을 이기지못하고 옥사했을 때 남긴 한마디 “ 충효로써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다.
김덕령은 죽고 나서 200년이 지나서야 시호 '충장공'과 '정려비'가 내려졌고 그 고향마을은 '충효리'란 이름을 하사받아 1789년에는 종1품 좌찬성을 추증되어 이름을 남겼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선비의 당당함과 현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이 든다.
선비사상이 나라를 구한 것이다. 나주는 자연풍광도, 정신세계도 아름다운 고장이다. 나주의 선비사상이 정치의 모태로 혼탁한 호남정치사를 바꾸어 대한민국의 정치를 정립시키는 초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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