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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교육
  • 기자명 빛가람타임스 기자

잃어버린 마한의 역사를 되찾게 한 감동의 주인공

  • 입력 2014.11.1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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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반남고분 유적보존회장 정제갑(鄭濟甲)옹(翁)

기억도 까마득한 1917년 일본 식민지시절 일제가 고분(古墳)을 도굴하여 7대의 트럭에 가득실고 일본으로 옮겨갔다. 지켜보는 나라 잃은 국민의 애타는 심정도 아랑곳없는 무자비한 일본인들의 잔인한 모습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당시 우리 모두의 아픔이었지만 그들이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과 문화 보존의식은 지금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다.
당시 금동관 1점을 조선총독이 가지고 있다가 패망하면서 관저에 그대로 두고 간 1점을 찾아 지금 나주 국립박물관 국보 29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반남면에서는 패망 후 일본으로 떠나던 일본인들을 그래도 인간적인 동정심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런 호의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 후손들이 아직도 일본에서 모임을 만들어 만나고 있다고 한다.
그들로 하여금 고분에서 가져간 유물을 추적하게 하여 일본의 모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남고분 출토 유물 전시회를 준비하는 사람(일본 고고학자 사보리)을 추적하여 사진 자료를 취득하여 그 자료를 학계에 넘겨주어 우리의 역사를 되찾게 하였다.
지역 어느 저명인사도 감히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역사를 되찾게 한 지역의 평범한 시민인 주인공은 1984년도에 반남고분 유적보존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활동을 하며 마한의 역사를 되찾는데 앞장 선 속칭 지역 고고학자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에 거주하는 정제갑(91세) 옹이시다.

가난한 가정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스스로 가난을 극복하고 남다른 애국심과 지역을 남달리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뒤떨어질 생각이 없으시다.
정 옹은 21세에 결혼하여 ‘슬하에 4남 3녀를 두고 손이 40여 명이나 된다.’는 자랑과 더불어 스스로 애국자라고 자칭하셨다. 지금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 젊은 층의 저출산 선호의 현실을 감안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옹이 조기 결혼한 사연을 들어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던 역사를 되새겨볼 기회도 가졌다. 부인 (0000)여사가 15세에 결혼을 했었다. 언론을 통해서나 알 수 있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추억으로 위안부 차출의 실화였다.
부인의 언니가 17세의 나이로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간 후 3개월 만에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왔을 때 집안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15세였던 부인은 잡혀가지 않으려고 부모님이 항아리 속에 숨기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며 공포 속에 살았다고 했다.
잡혀가지 않을 대안으로 조기결혼을 한 것이었다. 당시 그런 일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고 들었었지만 다시 한 번 일제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솟구쳐 가슴을 들끓게 했다.

결혼 후 바로 49세에 홀로되어 3남을 부양하던 모친과 부인을 남겨둔 채 일본으로 징용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떠나는 당시 옹은 다시 이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며 눈물 흘리며 고향을 등지고 떠났었다. 3월의 추위 속에 일본으로 건너가 군 생활을 하던 중 8개월 만에 해방을 맞아 귀국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배편을 구하기가 그다지 쉽지 않았다. 당시 ‘미군이 수송하던 배를 타면 맞아 죽는다.’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미군 수송선이 무서워서 도저히 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많은 한국인들과 함께 마침내 18톤의 소형어선에 몸을 싣고 귀국했다. 귀국의 길을 그야말로 ‘생사가 엇갈리는 길이었다.’고 회상을 하셨다.
귀국 후 고난과 가난을 극복하는 과정들이 옹을 부지런한 사람 그리고 애국자로 만들었다.
지금은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나주 시조협회 나주시 지회장을 맡으면서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고 있다.
주위의 지인의 말에 의하면 ‘정 옹의 일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도 따라가기 힘들다.’는 말과 함께 드높은 사랑과 존경하는 마음의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정 옹은 지나온 과거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시면서 거침없이 표출도 하신다.
60년대 새마을 사업이 시작될 때 그 누구도 앞장서기를 두려워했지만 주위의 권유도 마다하고 무보수로 자원하여 성공으로 이끌었고 반남농협(현 마한농협)의 설립 당시 자신의 자산을 담보로 제공하여 지역민들이 투자 동참을 유도하여 창업에 선도적 역할도 하셨다.
나주시 반남고분 유적보존회장, 나주시조협회장 외에도 동네 노인정의 설립과 학교육성회장의 역임 등 대소사 협의에 반드시 정 옹이 자리를 함께했다. 그 중 가장 빛나는 부분은 역시 반남고분 유적보존회장을 맡아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은 일이었다.
1977년부터 일본인들이 봄이면 고분을 찾아 묵념을 한 후 돌아가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이웃 공산 출신인 정승원 교수와 최몽룡 교수에게 자료 제공을 통하여 역사를 되찾고 최 교수 개인에게는 박사의 영예를 갖도록 해준 것이다.

지금도 정 옹은 지난 추억들을 되새기며 후배들에게 간곡히 뜻을 전해 본다. 잃어버린 200년의 역사를 되찾아 달라는 것이다. 끊임없는 그의 역사에 대한 고찰의 열정은 후배들에게 깊이 감명을 주고 나락(奈落)에 처해 있는 우리 조상들의 삶의 모습이 되살아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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